- 「헤매는 별 * 흔들리는 빛, 플레이아데스의 밤」 스토리의 모놀로그 시점 날조
- 나츠메 말투는 생략했습니다.
무엇이든 바싹 말리는 겨울이었다.
그 해의 가을에 알알히 맺히던 모든 증오도, 비관도, 절망도. 야유도, 환호도, 꺾인 꿈들도. 모두 땅바닥에 뒹굴며 한데 섞였다. 다사다난했던 혁명의 끝은 아직 감동의 피날레도 찬란한 해피엔딩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 최후는 다 떨어진 낙엽과 함께 그저 불에 탈뿐이었다. 겨울의 건조한 흙을 잔뜩 묻힌 채.
사카사키 나츠메는 그들의 업보와 같이 타고 있는 자신의 꿈을 보았다. 쓸 때는 현실을 외면하고 꿈을 꾸게 해 주었고, 깨고 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무언가. 필사적으로 고개 숙여 내밀었지만 거절당한 또 하나의 이야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린아이의 망상에 불과했다.
뭐가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미뤄서 학생회장의 병세 악화를 기다린다.' 야. 뭐가 '어떻게든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면 역전할 수 있어.'야. fine의 중심인물들이 졸업하면 당연하게도 오기인 형들도 졸업하고 말 텐데. 게다가 그 학생회장이라면 자기가 사라져도 뒤집히지 않을 안전책을 준비해 놓았겠지, 분명.
괜스레 이런 미숙한 것을 들이밀었던 스스로가 한심해진 나츠메는 까맣게 재가 되어가는 자신의 각본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그토록 여전히, 애정 담긴 시선으로. 그런 나츠메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츠무기도 따라 읽으며 입을 열었다.
"잘 타네요. 역시 겨울은 건조해서 그런 걸까요? 전 추위에 약해서 겨울은 힘들지만⋯ 이런 점은 좋네요♪"
"아무렇지 않듯이 잡담 시작하지 마. ⋯⋯선배, 겨울에 약했던가. 참고해 둬야겠어."
"대체 뭘 참고하시는 건가요⋯?"
오랜만에 나눈 대화는 의외로 막힘 없이도 흘러갔다. 츠무기는 이에 '역시 나츠메쨩과 저는 소꿉친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까요.',라는 이유를 마음속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문득 시선을 옮겨 하늘을 보았다. 아직 어떤 별도 뜨기 전인 한낮의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딱히 생각을 거치지 않은 어떠한 문장이 츠무기에게서 훌쩍 떠나갔다.
"⋯⋯그거 알아요, 나츠메 군? 파랑새는 여름 철새래요."
"응? 갑자기 웬 파랑새?"
"동화에 나오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 파랑새 말이죠. 실제로 일본에서는 여름에 와 활동한다더라고요. 신기하지 않나요?"
"아니, 전혀.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는데."
다소 뜬금없는 화제에 나츠메가 어이없다는 듯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츠무기는 싱긋 웃었다.
"아하하. 그냥 생각났어요. 나츠메(夏目) 군을 보니까 갑자기 여름(夏) 철새가 떠오른 걸지도요."
"뭔 상관이야, 대체⋯. 그보다 선배."
"네?"
"교복이 조금 탔는데."
그들이 대화하던 사이 낙엽과 종이 뭉치들을 연료 삼아 잘 타던 불길이 어느샌가 츠무기의 교복까지 닿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열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감각이 둔한 편이었다. 나츠메가 말해주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츠무기는 당황하며 이리저리 움직여 불씨를 껐다. 애초에 교복 끝이 살짝 탔을 뿐, 불은 붙지 않았다.
"아하하. 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불덩어리가 돼서 타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선배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잖아? 자기 몸이 불타도 모를 것 같단 말이지."
그 모습이 꽤나 우스운 듯 나츠메는 웃었다. 사실 하나도 웃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내가 오늘 이곳에서 우연히 저 선배를 발견하고, 말을 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수 분 전에 앞으로 함께하기로 한 참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멋대로 걱정시킨 것만큼 비관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픔을 모르는 저 사람이 과연 혼자서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까? 한계를 모르고, 속죄를 하겠다며 남을 돌보겠지. 자기가 위태위태하게 겨우 견디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픔은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수단이다. 스트레스 체계가 활성화되어야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지 도망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떠한가. 자기 피부 바로 근처까지 불이 와도 눈치채지 못한다. 어린아이 일 적에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 노출되어 그 체계가 망가진 거겠지.
그래서야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본인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 채, 몸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보내는 경고를 듣지도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어디에선가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마치 겨울이 다 되도록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지 못해 길가에서 얼어 죽는 철새처럼.
그래.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
'내가 근처에 머무르면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더 고통스러울 거 아냐. 이건 그런 복수야.'
사카사키 나츠메는 '평범한, 좋은 아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위대한 사람들과 잠시 엮여 함께 대단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사부에게도 역시 다 들켰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추하게 얼기고 설기다, 오기인이 종말을 맞이한 그날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래도, 만약.
아직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력 같은 것이 남아있다면, 복수로 포장된 이 '평범한, 좋은' 마음이 이번에야말로 해피엔딩을 자아낼 수 있기를.
'힘을 다해 평생을 바쳐서 매일 밤, 귓가에 저주의 말을 속삭여 줄게.'
그러니까, 살아.
도무지 자신을 위해서는 살 수 없는 거지? 츠무기 형.
당신 안에서 자기 자신이 너무 하찮은 존재라서, 어떤 일을 당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말대로 당신이 나에게 분풀이용으로 맞아도 되는 그런 존재라면.
적어도 내 저주를 들어서라도 살아. 좀 고통스럽고 아프면서, 그렇게 살아.
혁명으로 바빠져서 소홀해진 독서라든가- 그 어울리지 않던 안경이라도 쓰고 다시 하라고. 아이돌 활동을 하게 될 테니까 슈 형한테도 인정받은 그 수예 실력을 뽐내보든가. fine는 전문 디자이너가 있어서 취미로만 했을 테니,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써먹어줄게. 아까는 츠무기 형이 나한테 연장자 행세하며 설교나 했지만,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고개를 들고일어나, 아이돌이니 레슨도 계속 열심히 해서⋯⋯ 언젠가.
나츠메는 그 이후에 나올 말을 상상하며 어딘가 그립고 다정한 감정을 느꼈다. 어렴풋했지만, 어쩌면 뒤에 이어질 문장을 알 것도 같았다. 옛날에 분명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니 굳이 빤히 보이는 이 이야기의 엔딩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유닛을 짜게 되는 거죠? 콘셉트부터 먼저 생각하고 유닛 명을 정하면 좋을 것 같은데⋯."
"글쎄. 그보다 아까 이미 말했잖아? 일단은 좀 더 상처가 나은 뒤에-"
"으음~ 나츠메 군이 내키지 않는다면 제가 생각해 볼까요? 기존에 있는 유닛과 겹치지 않는 방향성으로 해야 하고, 유메노사키 학원의 유닛들은 대충 파악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저 이런 거 많이 해보지는 않아서⋯ 으음, 사카사키 나츠메⋯ 사카사키⋯ 사카⋯⋯. soccer? 나츠메 군, 혹시 스포츠 관심 있어요?"
"아 정말, 마음대로 해!"
그의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츠무기는 같은 유닛을 할 생각만으로 신나서 잔뜩 무언가를 구상해 내기 시작했다. 훗날 '스위치의 S는 스포츠의 S!'라는 슬로건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나츠메는 한숨을 쉬며 그들이 태우고 남은 잿더미를 두고 가든테라스를 나왔다. 그 뒤를 당연하듯 츠무기가 웃으며 따라나섰다.
겨울은 공기도 생명도 바싹 말리는 계절이고 봄은 아직 한참 멀었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여름 철새인 파랑새가 자신의 여름을 찾아내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음 여름까지, 더 나아가 앞으로 찾아올 모든 계절까지 살아낼 것이라는 것을.
굳이 뒷 이야기를 공들여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행복해지자, 우리 함께.
10년도 전에 걸린 마법은 그렇게 제자리를 찾았다. 다정한 저주로 아픔을 배운 파랑새는 여전히 그날처럼 한낮에 꿈을 꾼다.
오늘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아주 긴 이야기 속을 비행하며.